문벌 귀족 사회

고려의 문벌 귀족
11세기에 이르러 고려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자리 잡은 문벌 귀족은 이자겸을 비롯한 경원 이 씨 가문과 김부식을 비롯한 경주 이 씨 가문 등이 대표적이다

왕실 또는 세력이 비슷한 가문 끼리 혼인 관계를 맺어 문벌을 이루고 권력도 장악했다. 과거에 합격하거나 음서제를 이용해 높은 관직을 독점하고 나라에서 공음전을 받아 자손에게 물려주었다.

이자겸의 난 (1126년)

이자겸은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 귀족으로 왕이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이 사건은 문벌 귀족 사회를 흔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 여기서 이자겸은 누구일까?? 이자겸의 아버지 경원 이 씨 집안은 대대로 왕족과 혼인 관계를 맺었고 이자 겸도 자신의 딸을 예종과 인종에게 시집보내면서 고려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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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이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려고 했고 이를 눈치챈 이자겸이 먼저 난을 일으켜 척준경에게 궁궐에 불을 지르도록 하여서 인종을 죽이려고 했다. 여기에 인종은 척준경을 설득해서 이자겸을 대신하도록 했고 힘을 잃은 이자겸은 귀향을 가게 되었다.


묘청의 서경 천도 (1135년)

 

이자겸의 난 이후 묘청 등은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이자겸의 난이 진압 되었지만 여전히 나라가 혼란스럽고 묘청 등은 풍수지리 설을 내세워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것을 왕에게 건의했다. 왕과 묘청은 서경에 궁을 세우는 등 도움을 옮길 준비를 했고 김부식 등 개경을 기반으로 한 문벌 귀족의 반대로 서경 천도가 어려워졌다.
묘청 등 서경 천도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듬해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묘청 세력이 진압되었고 서경 천도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무신정변의 발생

고려 사회의 뿌리 깊은 무신 차별 정책들을 살펴보면 무신을 뽑는 문과가 거의 시행되지 않았고 하급군인에게 주어진 토지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무신들이 오를 수 있는 관직에 제한이 있었고 가장 높은 관직은 문신들만 차지할 수 있었고 무신들은 전쟁에 나가도 문신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한편 무신들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은 보현원에서 '수박희'라는 무예 시합을 하라고 명령을 하였는데 칠순이 넘은 대장군 이소응이 시합에서 빠지려 하자 젊은 문신 한뢰가 이소응의 빰을 때려서 무신들에게 치욕을 주었다.
그날 밤 보현원에서 정중부와 이의방 등이 무신들은 문신들을 모두 죽이고 개경으로 들어가 정권을 차지했다 그리고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새 왕으로 내 세웠다
이때부터 100년간 무신 정권을 잡았고 이 시기를 우리는 무신정권 시대라고 한다

무신정권의 변천

이의방 정중부 등은 무신 정권 성립기에 서로 정권을 차지하려고 다툼을 벌였고 무신들은 중방이라고 하는 무신 회의 기구를 통해서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게 되었다

무신정권의 안정기에 접어든 최충헌 최우 등에 최 씨 무신정권은 교정 도감을 만들고 권력을 휘둘렀고 삼별초등에 군사 기구도 두었다. 김준등으로 인한 무신정권 쇠퇴기는 최충헌 가문의 노비 출신인 김준에 의해서 끝나게 되었다 이후 고려의 왕이 몽골과 관계를 맺으면서 최씨 무신정권의 최우는 몽골이 침입 하자 도읍을 강화도로 옮겼고 이후 40년 동안 몽골과 항쟁하였으나 무너지게 되었다

무신정권에 세워진 교정도감은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 기구였고 삼별초는 치안과 국방을 담당하는 군사 기구였다.

무신정권 시대에 일어났던 농민과 천민의 봉기


망이 망 소이의 난
소는 일반 군현에 비해 차별받았고 무거운 세금을 내야 하는 사람들의 불만이 많아졌다 망이와 망소이 형제가 봉기를 일으키자 나라에서는 명학 소를 일반 군현으로 올려 주겠다고 설득했고 나라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자 두 형제가 다시 봉기하였고 관군에 의하여서 진압되었다. 명학소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대전에는 망이 망소이의 봉기 기념탑이 있다

만적의 난
만적은 최충헌의 노비로 같은 처지의 노비들을 모아 봉기를 계획했다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최충헌을 죽인 다음 권력을 차지하려고도 했다 노비 한 명의 배신으로 최충헌이 만적이 계획을 알게 되었고 최충헌은 만적 등 100명의 노비를 강물에 던져 죽임으로 이를 진압했다. 만적의 난은 고려 시대에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노비 신분을 벗어나려 했다는 점에서 신분 해방 운동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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