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초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양위한 태조의 소어궁(所御宮)을 정종이 개성에 건립하여 덕수궁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태종이 서울로 재 환도하여 지금의 창경궁 부근에 태조의 궁을 세웠을 때에도 같은 이름인 덕수궁이라 하였다

덕수궁(德壽宮)은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궁궐로서,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의 면적은 현재보다 넓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다.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주었고, 이후 한 씨의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에는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이듬해에 다시 중건했으며, 1906년엔 대안문(大安門)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게 됐다. 1907년(순종 1)엔 순종이 즉위 후 궁호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개명되었다. 경복궁이 소실되었던 1611년 ~ 1615년에는 조선의 정궁, 1897년 ~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궁역이 대규모로 축소되고 전각들이 대부분 훼철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덕수궁의 역사

 

현재의 덕수궁은 본래 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 장(懿敬世子 暲)의 큰아들, 즉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었다. 의경세자는 20세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부인인 수빈 한 씨(인수대비)가 출궁 하게 되자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 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
월산대군의 아우인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등극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 씨도 입궐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광해군 시대


광해군은 1611년 11월 15일(광해군 3년 음력 10월 11일) 창덕궁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 지었다. 광해군은 창덕궁에 약 2개월간 거처하다가 그해 음력 12월 경운궁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는 창덕궁에 거처하였던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이 그곳에서 폐위되어 불길한 궁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 하게 된 것은 1615년 음력 4월이었으며, 창덕궁·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 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1618년에는 그의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하고 대비의 칭호를 폐지하였으며, 경운궁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궁(西宮)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후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을 추대하고 반정(反正)을 일으켜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이 등극하게 되자 인조는 경운궁 별당에 행차하여 인목대비를 찾아뵙고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 궁에서 거처하지 않고 그로부터 8일 후 인목대비와 더불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그해 음력 7월에는 30년간이나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대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

 


법궁이 된 덕수궁

 

1897년(건양 2) 2월 20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법궁이 된다. 고종이 이곳을 궁궐로 정한 이면에는 주위에 러시아·영국·미국 등 강대국의 공사관이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보호를 요청하기 쉬운 곳이라는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1981년 발굴조사에 의하여 러시아 공사관의 종탑 밑에는 밀실(密室)과 비밀통로가 마련되어 있었고, 이것은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고종의 황제 즉위식이 있어 우선 소공동(小公洞)의 원구단(圓丘壇)에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이날부터 이 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 되었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1901년에는 경희궁(慶熙宮)으로 통하는 구름다리가 가설·개통되었고, 이 법전을 중화전이라 이름 지었다가 즉조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공사는 10월에 완공되고 중화문도 완공되었으며 관명전도 영건 되었다. 이 당시의 중화전은 2층 건물로 규모가 장대하였으며 주위에 행각(行閣)이 있었다.

중화전은 그해 1월부터 시작하여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는데 대한문은 원래 높은 장대석의 기단이 있고 장엄한 돌계단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스팔트 바닥에 묻혀 있다.

화재 이후


1904년 2월에 영선사(營繕司)에서 함녕전의 온돌을 수리하던 중 실수로 불이 나자 거센 바람을 타고 중화전·즉조당·석어당(昔御堂)의 중심곽 건물뿐만 아니라 많은 건물들이 불타게 되었다. 화재를 면한 전각으로는 준명당·수옥 헌·가정당(嘉靖堂)·돈덕전(惇德殿)·구성헌 등이 있었다. 고종은 그날로 전각에 대한 중건을 명하여 우선 즉조당·석어당·경효전·흠경각(欽敬閣)을 응급 복구하였다. 이 무렵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1905년 10월 21일 밤에는 일본의 압력으로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체결되는 등 혼란이 계속되어 공사가 활발하지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중화전의 재건이 진행되었으므로 원래대로 2층으로 복구하지 못하고 단층으로 짓게 되었다.
고종이 퇴위하고 태자인 순종이 즉조당에서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 개원(改元)하고 개원과 더불어 고종이 머물던 태황제 궁(太皇帝宮)인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德壽)라 함으로써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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