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 28일 ~ 1637년 2월 24일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 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 만의 백성이 청 제국으로 끌려가 사회적 피해가 심하였다

병자호란의 개요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나, 강화조약에 따라 명과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조선이 친명 정책을 변경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홍타이지는 명과의 전면전 전에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1636년 12월 2일, 12만 군사로 조선을 침공했다. , 인조는 청군이 한양에 거의 접근한 12월 14일에서야 파천에 나섰으나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이미 차단당한 이후라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1636년 12월 28일 청 태종이 이끄는 군대 약 10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자 임경업장군은 백마 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기세를 꺾어 놓을 만반의 준비를 마쳐놓았다. 하지만, 인조를 잡는 게 목적이었던 청나라군은 백마 산성을 비롯한 모든 산성을 우회해서 한성을 향해 신속히 진격했고 보름도 채 지나지 않은 1월 9일 개성을 통과했다.

강화도에는 세자빈(소현세자의 부인)과 봉림대군(후일 효종)을 비롯하여 왕실과 역대 임금의 신주가 피난해 있었다. 인조와 조정은 수전의 경험이 적은 청군이 강화도를 공략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으나, 청군은 명 수군 출신의 공유덕과 경중명 등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하였고 결국 1월 30일(양력 2월 24일) 출성 하여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였다.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로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이 수성에 나서 청군이 이를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조정은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항전하는 동안 전국 각지의 관군이 집결하여 청군의 포위를 풀 것을 기대하였으나, 충청도 근왕병의 진격이 죽산에서 멈추었고(12월 19일) 12월 2일에서 청군에게 패배하였으며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라도 근왕병마저 탄약 부족으로 퇴각함으로써 남한산성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인조와 조정은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대피하려고 했으나 청군의 신속한 남하로 강화도로 가는 길이 진작 차단되는 바람에 1월 10일 남한산성으로 긴급히 대피하였고 한성은 청군에 함락되었다.

1637년 2월 2일 청 태조는 먼저 청을 향해 출발하였고 2월 8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예친왕 도르곤을 따라 심양으로 떠났다. [조선 백성은 후금(후에 청으로)군에게 포로가 된 백성을 제외하고도 심양에 있는 노예시장에서 60만 이상이 거래되었다.

이리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자 부부가 인질로 가고 척화파 강경론자인 이른바 삼학사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잡혀가 참형되고 김상헌도 뒤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중에서 생활하였다. 이 사람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여인과 여러 관리와 대신의 많은 자녀가 청의 사신 잉굴다이에게 붙잡혀갔는데 그 수는 197명이다.

한양은 종로와 광통교 일대에 있던 집은 모두 파괴되었고 많은 마을이 약탈과 방화로 아수라장이 되어 임진왜란 후 회복하려는 노력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아이힘 한국사

 

 

효종의 북벌정책


두 차례의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의 지배층은 청나라를 쳐서 복수해야 한다는 북벌론이 일어났다. 특히,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었던 효종은 심양에서 겪은 인질로서 고초와 굴욕을 분히 여겨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상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과 함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수축(修築)하고 군대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청이 한족의 반발을 누르면서 대중국(對中國) 지배를 공고히 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였으므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왜란 및 호란과 관련된 국내외 유적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남한산성 남문 또는 수어장대는 병자호란 때 인조 가 머무르며 청나라에 대항했던 곳이다
귀 무덤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에 수많은 백성들을 죽이고 전리품을 가져갔던 귀와 코를 묻은 귀 무덤으로 일본 교토에 있다

삼전 도비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는 삼전도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았고 그 내용을 적은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그때 비석은 오늘날 서울시 송파구에 삼전 도비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병자호란 패배의 원인


조선은 임진왜란에서의 국력 상실. 이괄의 난으로 인한 북방 군의 감소, 오합지졸의 군사, 수성 위주의 방어 전술, 최고 지휘관의 무능, 강화도 도하 실패하였고 청은
산성과 거점 지역을 무시한 빠른 진군, 강화도를 함락하였다
남한산성 내부에 비축된 식량의 부족, 청에 의한 강화도 함락, 구원군의 지속적인 패배로 인한 사기저하로 항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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