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4일 (선조 25년) 도요토미 정권 치하의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하여 1598년(선조 31년)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년에 일어난 일본의 난리란 뜻으로 지칭되며 그 밖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란 뜻으로 조일전쟁, 임진년에 일어난 전쟁이란 뜻으로 임진전쟁,  임진년에 왜가 일으킨 란이라고 해서 임진왜란이라고도 하고 도자기공들이 일본으로 납치된 후 일본에 도자기 문화가 전파되었다하여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은 두 차례의 침략 중 1597년의 제 2차 침략을 정유재란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뿐만 아니라, 대명과 여진족 등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의 결과,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고, 인구는 최소 10만 명 이상 감소했으며, 경작지의 2/3 이상이 황폐화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의 배경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차 쓰시마국의 슈고 다이묘 소 요시토시를 이용하여 조선에 교섭을 청하였는데, 그들은 명나라와 사대외교를 하고 싶어하였다. 이에 조선의 조정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1590년(선조 23년)에 일본의 요구에 대한 응대와 더불어 일본내의 실정과 히데요시의 저의를 살피고자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조선의 정치 상황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 신분 제도와 군역 제도가 무너져 권문세도가가 농장을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이때에 공납 제도도 문란해지는 등 사회 전반이 혼란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실의 척신들의 정권 쟁탈전이라 할 수 있는 을사사화가 발생하였고 이후 사림파 집권 이후 정권은 동인과 서인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을 거듭하였다
조선은 초부터 사대교린정책을 수립하여 명과는 사대하고 여진과 왜에는 교린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하지만조선의 역사상 유래 없는 평화로 군사력이 약해진 결과 교린 정책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전쟁의 시작

히데요시는 쓰시마 국주에게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하고 명나라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길잡이를 맡으라고 명령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명나라를 정벌하는 데 길을 빌려달라는 말(가도입명 : 假道入明)로 좋게 바꾸어 조선에 교섭해 왔으나 조선은 거절하였다. 교섭이 결렬되자 히데요시는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군대 약 20만을 조선으로 파병해 침공하였다. 이날 정발이 지키는 부산진성과 송상현이 지키는 동래성이 일거에 함락되었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선의 왕과 백관은 여러 비상대책을 강구하였다. 신립의 패보는 한양의 인심을 극도로 동요시키고 선조는 마침내 정신(廷臣)과 더불어 한양을 떠나 개성·평양 방면으로 도망치고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라고 시키고 명나라에 사신을 지속으로 보내어 구원을 계속하여 청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왕이 한양을 나왔을 때 분노한 백성이 궁궐을 태워 버리고 노비는 자신의 문적(文籍)을 알고 있는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다.

조정에서는 평양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이를 이끌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의병 부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인정하였다.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활발히 활동하는 것을 전해 들은 각지 사대부와 백성은 광해군을 따르고 근왕군에 참가하려고 찾아왔다. 광해군은 근왕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확보하였으며 민심을 안정시켰다.

왜란과 호란 아이힘 한국사



1592년 또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탁월한 전술을 이용하여 일본 수군을 음력 5월 사천 해전에서, 음력 6월 당포 해전에서, 음력 7월 한산도 대첩에서 패퇴시키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일본군은 보충 병력과 군수품 수송이 어려워져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명나라에서 온 원군의 활약과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동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소강상태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국내 각처에서는 일본군의 침공에 대항하는 의병이 일어났다.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하여 의령과 창녕에서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고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일본군을 방어하였다. 묘향산의 서산대사 휴정스님은 격문을 팔도 승려에게 보내 제자 사명당 유정과 더불어 승병 1700명을 이끌고 평양 탈환전에 참여해 공을 세워 도총섭에 임명되었으며, 스님의 제자 처영도 승병을 모집하여 전라도에서 권율과 함께 활동하였다.

특히, 조선군은 김시민의 제1차 진주성 전투, 권율의 이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크게 방어하여 전라도가 온전할 수 있었고, 왜란 직전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임명장을 수령받지 못해 진도군수 자격으로 한산도대첩에 참여했던 선거이가 개전 8개월만에 다시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재임명되어 전라도 병력을 수습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것 등이 일본군을 주춤하게 하였고 이순신의 전라 수영이 육지에서 일본군의 내습 걱정 없이 해전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행주대첩은 권율의 분전도 있었지만, 승병을 비롯한 병사들의 용맹한 활약과 화차의 활약이 매우 컸다. 행주산성 방어전은 김시민의 진주성 전투,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이다.

승전의 뒷 배경에는 단순히 뛰어난 지휘력과 급습 말고도 총통이라는 훨씬 더 강력한 화력병기 및 안정적인 판옥선에 더해 거북선이라는 새로운 전투함이 조합된 '발전되고 강력한 무기체계'의 전력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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