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신라는 통일 이후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하며 진골 귀족의 힘을 통제하려 하였지만,  8세기부터 소수의 귀족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진골 귀족들 간에 분열이 나타났다. 또 계속된 왕위 다툼으로 인해 왕권이 흔들리게 되었고, 정부의 지방 통제력도 약해지면서 지방의 호족들이 성장하였다. 결국 각 지방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진 호족들이 중앙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러한 배경은 후삼국 통일 이후 고려 태조가 지방 호족을 경계하여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들을 펼친 이유가 된다

신라의 성시(盛時)로부터 무거운 조세와 역역(力役)을 부담하고 있던 농민은 유민(流民) 혹은 도적이 되어 질서를 교란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질서는 금성(金城, 경주)을 중심으로 한 신라의 구질서에 대한 타격을 뜻한다. 조세의 독촉은 영세한 농민층을 자극하여 농민반란(農民叛亂)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리하여 진성대왕때 원종고 애노라는 두농민이 세금을 내는것부터 거부하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원종과 애노의 난이다.  반란은 겨우 진정되었으나 호족들은 대혼란을 틈타 세를 확장하고 백성들은 도적의 무리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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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후삼국 시대(892년 ~ 936년)는 통일신라 시대에 지방의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각지에서 견훤 궁예 양길등이 활약하던 시대이다. 892년, 신라의 비장 견훤이 서남부의 무진주를 점령 후 개국공을 칭한 후부터 936년 고려의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킬 때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앞서 신라, 고구려, 백제가 대립하던 시기를 삼국 시대라고 하여  그때와 구분하기 위해 이 시기를 후삼국이라 부른다. 후백제의 견훤이 처음 왕을 선포한 900년을 시점으로 후삼국 시대를 이야기 하기도 한다. .

견훤의 반란


원래 남해안을 지키는 신라의 군인이였던  견훤이 옛 백제 땅으로 가서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옛백제 땅으로 가서 나라를 세웠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자 스스로 후백제(後百濟)라 칭하였는데, 무주(武州) 동남쪽의 군과 현이 항복하여 소속되었다. 이어 서라벌 서남쪽의 주현(州縣)을 공격하였다

궁예의 세력확장


891년에 죽주(竹州)의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멸시를 받자 빠져나와 892년에 북원(北原)의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궁예는 양길의 신임을 받어 군사를 거느리고 주천(酒泉:지금의 예천)·내성(奈城:지금의 영월, 어진(지금의 울진) 등을 공략하여 항복 받아냈다. 894년 10월에 명주를 점령하면서 강릉지역까지 수중에 넣었다. 그는 여세를 몰아 화천, 철원 등 강원도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궁예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패서지역(예성강 이북 지역) 호족들이 차례로 궁예에게 자진 투항하였다.이때 궁예밑으로 들어가 활약하던 호족이송악 출신의 왕건이었다.  이렇게 되자 궁예는 더 이상 양길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양길과 결별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사실상의 후고구려의 건국의 시작이다. 896년에는 7월 임진강을 따라 북상하여 당시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의 호족이었던 왕륭(왕건의 아버지)의 투항을 받았다. 궁예는 왕륭의 아들 왕건을 철원군 태수로 임명하였다. 그는 왕륭과 왕건 부자의 도움을 얻어 손쉽게 경기북부지역과 서해안 일대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리고 경기지역 호족들의 경제적 지원에 힘입어 충주지역 일대까지 무력으로 병합하였다. 898년 송악을 후고구려의 사실상 수도로 삼고, 왕건으로 하여금 양주와 청주(淸州;溫陽) 등 30여 성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신라의 개혁

신라에 최치원이 나타났다. 그는 당나라에서 884년 음력 10월 귀국했고, 885년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이 되었으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부의 직책을 자청하여 태산 (지금의 전북 태인)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나라의 멸망을 앞당긴 진성대왕은 반란군과 호족세력이 난무하는 가운데서 인재들에게 개혁안을 올리라고 독촉하였고 이에 최치원은 894년 진성대왕에게 시무10조를 올렸으나  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인하여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세력

901년 8월에 후백제 왕 견훤이 대야성이 워낙 견고하여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사를 금성(錦城)의 남쪽으로 옮겨 연변의 마을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903년에 금성(현재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왕건의 수군 기습에 의해 빼앗겼다. 또, 906년에는 상주의 사화진 일대에서 왕건과 싸워 패전하였다.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군사를 재정비한 후백제의 견훤은 몸소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서해의 해상권 회복을 위해 나주성을 에워싸고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결국, 궁예가 수군을 내어 그들을 습격하자 견훤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왕건 덕에 승승 장구하는 궁예는 903년 도읍을 옮기고자 하여 철원과 부양(斧壤)에 이르러 산수를 두루 살펴보았다. 904년에는 여러 관직을 설치하였는데, 신라의 제도를 많이 따랐다.

 

후삼국의 통일

한편 후백제의 국내 정세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 견훤이 그의 아들 신검 등에게 금산사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전열(戰列)이 분열되었고 결국에 왕건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명목만 유지하던 신라의 경순왕은 935년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무장이며, 동시에 정치가이며 외교가인 태조는 이로써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936년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까지도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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