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이 아버지인 문무왕의 뜻을 이어받아 감은사를 완성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고 한다.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온 것이다. 신문왕이 신하를 불러 점을 쳤더니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김유신이 함께 나라를 지킬 보물을 내려 주려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왕은 감은사로 가서 배를 타고 작은 산에 올랐고 그곳에서 용을 만나 "섬의 대나무를 베어 피리를 만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섬에 대나무는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신기한 나무였다고 한다. 신문왕은 용의 말에 따라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나았으며 가물 때는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면 날이 개였으며 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가 잔잔해졌다고 하니 신문왕은 이 피리에 '만 가지 거센 파도를 휴식하게 하는 피리 '라는 뜻으로 '만파식적'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나라의 보물로 삼았다고 한다



문무 대왕릉의 무덤을 방문하여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수중릉을 돌아보며 정리해본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 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중앙 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 통치를 위한 5 소경 제도와 9 서당 10 정의 군사 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를 완성하였다



바닷물은 파도와 함께 동쪽 물길을 따라 중앙 공간으로 흘러들어와 서쪽 물길을 통해 빠져나간다. 대석의 안치 방법과 유골의 수장 여부에 대하여 그동안 많은 의문점이 있었지만 2001년 3월 한 방송사에서 역사 연구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초음파 탐지기 등을 이용하여 바위의 조직과 내부 수면 아래를 조사한 결과 대왕암 내부 또는 아래에 유골이나 부장 품이 존재하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만파식적에 언급된 감은사도 문무 대왕릉 가까이에 있었다

 

감은사 터

감은사 터에는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답이 있다 이단의 기단 위에 3층 탑 신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험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 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곳에 터를 잡았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된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경주 이견대

또한 경주에는 이견대라고 하는 문무왕 수중 릉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을 볼 수 있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이견대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 정신을 받들어 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다

신문왕은 해변에 감은사라는 절을 직고용이 된 아버지가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다고 한다 그 뒤의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고 이견 대에서 신문왕 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받았다고 한다

1970년 그 건물들을 발견하여 진로 누가 왕을 딛고 이겨 내라 현판을 걸었다 고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건물 안에 새집들도 많았고 새똥으로 인해서 눈살을 찌 푸리 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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